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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tering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Written by oceon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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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깐. 그냥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누군가 내게 가장 무서워하는 감정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난 이제 망설임 없이 상실감이라고 대답할거야. 그리고 이렇게 쓸쓸히 덧붙일거야. 난 늘 그것과 함께 살아왔었노라고. 어딘지도 모를, 그렇지만 내가 아는 나만의 깊숙한 바다 속에서, 저기 저 유영하는 물고기들처럼... 쓸쓸하고 조용히 헤엄쳐왔었노라고..’


소녀의 표정에는 깊숙이 깃든 아린 감정이 서려있다. 덜그럭 덜그럭, 버스 창가에 힘없이 기댄 그녀의 작은 머리통이 유리 창문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소녀는 소년에게 기대하지 않으려했다. 그렇게 마음을 굳세게 먹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직 소년을 향해 걸었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실망과, 그로 인한 허무함 뿐이었다. 소녀가 건조한 두 눈을 제 손으로 부비볐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허나 그녀를 둘러 싼 공기에는 적막하고 공허한 기운이 웃돌았다.


‘나는 널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나보다. 너를 향했던 내 애정이 지나간 곳에는 아직 온기가 서려 흔적처럼 남아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물어온다면, 나는 너의 온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 차가운 바다 속에 들어온 너는 한 줌의 햇살을 머금은 따뜻한 모래였다.‘



〰️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육교에 선 소녀의 머리 위에는 그녀의 세상과 같은 바다가 조금의 먹구름과 함께 두둥실 떠 있다. 소녀는 찬찬히 고개를 들어 바다 속을 탐험하고, 싱그러운 내음을 맡고, 또 천천히 눈을 감는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소년의 따스한 모래는 그저 제가 가진 성질이었을 뿐, 그녀의 차가운 물 속에 닿으면 금방 식어버려, 두 눈에 채 담기도 전에 미련없이 사라져 버릴 존재였단 걸.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진 모래는 알갱이로 남아 여기저기 흩어져 자리 잡았다. 이제 그 흔적들을 내 두 손으로 주워 담을 순 없을 것이다. 추억으로, 혹은 눈을 뜨면 사라자버릴 꿈으로 남을 테지.
안녕. 나의 사랑.
한 번 더 다시 느낄 수 있을 지 모를, 그런 사랑.’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꺼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나는 또 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이란 세월이 있을 뿐이지


/ Artworks via 강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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